출연진 및 제작진
영화 라이터를 켜라는 장항준 감독의 데뷔 연출 작품으로, 당대 충무로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총 출동한 작품입니다. 주연을 맡은 김승우는 나이 서른에도 백수를 면치 못하는 허봉구를 유머와 공감 사이를 절묘하게 표현했으며, 차승원은 폼만 살아있는 조직 보스 양철곤으로 카리스마와 개그를 동시에 발산했습니다. 조연진도 화려합니다. 박영규가 얄밉고 비겁한 국회의원 박용갑을 맡았고, 강성진이 입을 멈추지 못하는 '떠벌남' 택배기사 역으로 중독적인 웃음을 선사합니다. 여기에 유해진,이문식,이원종,성지루,정은표 등 당신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등 박정으 작가 작품 단골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반가운 앙상블을 이룹니다. 감독 장항준은 주인공 봉구를 괴롭히는 동창 '희창' 역으로 직접 까메오 출연하는 재치도 보여줍니다. 내 머릿속의 배우들의 최초의 모습은 아저씨였는데, 그들의 어린시절에 찍은 단체 졸업 작품을 보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줄거리
나이 서른, 부모님 지갑에서 몰래 돈을 빌려 예비군 훈련을 마친 허봉구, 하는 일마다 꼬이는 하루 끝에 수중에 남은 거라곤 달란 단돈 300원뿐입니다. 차비도 없고 배도 고픈 봉구는 그 300원으로 일회용 라이터 하나를 삽니다. 그런데 서울역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그 라이터마저 두고 나와 버렸습니다. 황급히 돌아갔지만 라이터는 이미 건달 보스 양철곤의 손에 넘어간 뒤였습니다. "저... 그 라이터 제 껀데요..."봉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지만, 철곤과 부하들은 그를 처절하게 무시하며 뭉개버립니다. 늘 치이고 찍히던 봉구의 마지막 자존심이 바닥을 치는 순간, 그는 결심을 합니다. 절대 그냥 물러서지 않겠다고. 한편 철곤은 국회의원 박용갑의 선거를 도와준 대가를 받으러 서울역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박의원은 과거가 드러날까 두려워 모르쇠로 일관하고, 격분한 철곤은 부하들과 함께 부산행 새마을호를 점령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봉구는 오직 라이터 하나를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기차에 몸을 실으며, 전혀 의도치 않은 기차 납치 사건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됩니다. 기차 안에서 봉구, 철곤, 박의원,그리고 각양각색의 승객들이 뒤엉키며 108분간 숨 막히는 코미디 소동이 펼쳐집니다.
영화의 의미
라이터를 켜라는 단순한 웃음 너머, 2002년 한국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입니다. 300원짜리 일회용 라이터는 허봉구의 유일한 재산이자, 사회 하층민의 마지막 자존심을 상징합니다. 아무도 봉구에게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하고, 짓밟습니다. 그 라이터를 되찾으려는 황당한 집념은 곧 "내 것은 내 것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인 셈입니다. 영화는 예비군 훈련 장면을 통해 1990년대~2000년대 초 한국의 군사 무화를, 조폭과 국회의원의 커넥션을 통해 정치 비리를 통렬하게 풍자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들떠 있던 시기에 일부러 한국 사회의 그늘진 면을 불편할 정도로 솔직하게 들춰낸 점이 이 여오하의 묵직한 지점입니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들이 제각각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지만, 그 광기는 사실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실의 과장입니다. 허봉구의 라이터는 훗날 <존 윅>의 강아지, <테이큰>의 딸과 같이 "사소해 보이지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의 원형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장항준 감독은 데뷔작에서 사회 풍자와 장르 오락을 능숙하게 엮으며 자신만의 색깔을 또렷이 새겼습니다. 가벼운듯 유쾌하며 사회 문제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내용이 장항준 감독 자체를 투영시킨 듯 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영화 라이터를 켜라가 한참 전에 개봉하기도 했고, 사회 계급의 피라미드 라든가, 기차 안에서 전진하는 모습 등이 아마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의심된다.